[가신 이의 발자취] 영원한 춤꾼 이애주님을 추모하며
지난 3월말 경기도 과천의 이애주춤전수교육관에서 고인의 마지막 유지에 따라 ‘재단법인 이애주문화재단’ 창립총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필자 유홍준 석좌교수, 고 이애주 이사장, 제부인 판소리 명창 임진택 대표. 이애주한국전통춤회 제공
이애주님이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셨다. 석 달 전 몹쓸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한생을 같이 해온 몇몇 벗들과 과천 댁으로 찾아갔을 때 벌써 온몸이 피폐해졌으면서도 꼭 훌훌 털고 일어나 한바탕 춤을 출 꺼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는데 그것이 우리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애주님은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이고,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제27호 승무의 보유자이지만 당신은 그저 ‘춤꾼’이라 불리기를 원했다. 실로 이애주는 우리시대 불세출의 춤꾼이었다. 그는 말했다. 춤은 몸의 언어이자 시대의 언어라고. 이애주에게 있어서 전통춤과 현대무용은 둘이 아니었고 무대도 따로 없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생생히 기억하실 것이고, 나이 어린 분들은 그때의 전설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보아 알고 있을 것이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흰 치마저고리에 머리띠를 동여매고 멍석말이 속에서 나뭇가지 장단에 맞추어 꿈틀거리며 일어나 무명 한 필을 둘로 가르며, 민주열사가 쓰러지면서도 외친 민주화를 몸짓으로 되받으며, 연세대에서 시청 광장까지 맨발로 앞에서 운구를 인도했던 그 춤꾼 이애주. 그때 언론들은 이 낮선 아스팔트 위에서의 춤을 ‘시국춤’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바람맞이 춤’이었다. 그때 춤꾼은 말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열망이 내 몸을 통해 바람맞이 춤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그냥 바람부는 대로 내 몸이 따라갔을 뿐이다.” 그리고 정확히는 ‘썽풀이춤’이라고 했다.
80년대 민족민중예술 계시이자 모범
민예총 민미협 민족극 탈춤패 ‘영향’ ‘87년 대선’ 백기완 후보 지지 ‘충격’
“묏비나리 첫 구절 등 민중미학 심취” 석달 전 벗들 불러 자택·땅 내놓아
10일 전 ‘이애주문화재단’ 설립 인가
2014년 백기완(왼쪽) 선생과 이애주(오른쪽) 서울대 명예교수가 1988년 함께 만들었던 ‘이애주 한판춤 그림책’ 달력을 26년 만에 찾아내 살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애주님은 1947년 황해도 사리원 우체국장의 딸로 태어나 5살 때부터 국립국악원의 김보남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하여 어린 시절 전국무용대회 우승을 휩쓸었고, 1969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를 졸업한 뒤에는 인간문화재 한영숙의 이수자가 되어 전통춤을 익혀갔다. 그리고 우리 전통 미학을 보다 깊이 배우기 위하여 서울 문리대 국문과 3학년에 학사편입하여 그때 채희완, 김민기, 임진택, 김영동, 김석만, 그리고 시인 김지하, 화가 오윤을 만나 평생의 벗이자 문화예술패의 동료로 일생을 같이했다. 이애주님이 춤을 발표하기 시작하는 것은 1974년 ‘땅끝’ 공연이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84년 ‘춤패 신’을 창단하고 ‘도라지꽃’을 공연한 때부터였다. 그때 이애주의 춤은 대단히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그 무렵 막 창단한 민예총, 민미협, 민족극회, 탈춤패 등에게 이애주의 춤은 하나의 계시이자 모범이었다. 민족민중예술이 어떻게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지, 전통과 현대는 어떻게 하나로 어울어질 수 있는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윤의 판화에 등장하는 춤의 모델도 바로 이애주님이다. 그림마당 민, 한마당, 연우무대 등 민중문화운동의 현장에는 이애주의 춤이 있었고, 이것이 1987년 6월 민주화 대행진의 출정식 무대를 장식했고, 급기야 7월엔 이한열 열사 장례식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러던 이애주님이 ‘87년 대선’ 때 백기완 후보 명예위원장으로 텔레비전 지지연설에 나서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왜 정치에 뛰어들었냐, 왜 하필 백기완 후보냐, 하고 실망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애주님은 백기완의 민중미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는 백기완의 ‘묏비나리’ 첫 구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맨 첫발/ 딱 한 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걸지 않으면/ 천하의 춤꾼이라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 발띠기에/ 온 몸의 무게를 실어라.” 1990년대들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애주님은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떠나 한성준, 한영숙으로 이어지는 살풀이춤과 승무의 계승에 매진하여 1996년엔 그 자신이 무형문화재 제27호의 승무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00년을 넘어서면 우리 조상들의 제천의식이었던 영고, 무천, 동맹을 추적하여 고구려 고분벽화 춤무덤을 찾아가고, 더 본질적인 것을 찾기 위해 대산 김석진 선생의 주역 강좌를 수강하며 과천에 춤연구소를 개설하고 ‘몸이 알아서 자연적인 몸 장단으로 응할 수 있는 경지’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춤꾼이 가야 할 마지막 단계로 보였다. 이애주님은 석 달 전, 평생의 벗 임진택·최열·박용일과 나를 불렀다. 이제 몸이 자연과 합일하는 ‘자연춤’의 세계가 무언가 손에 잡힐 듯하다며, 춤의 본질과 민족미학을 더 본격적으로 파고들어야겠다며, 재단법인 이애주문화재단을 설립해 달라고 과천 집과 땅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경기도로부터 마침내 재단법인 인가증을 받은 지 딱 열흘 만에 저 세상으로 홀연히 떠나가신 것이다. 이애주님이시여, 춤꾼이시여, 누님이시여. 편히 가십시오. 유홍준/공동 장례위원장·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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